7).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라틴어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옛길을 따라 14개의 지점에 그림 또는 조각으로 표시해 놓고 그날의 슬픈 현장을 생생하게 회상케 해준다.
종려주일이 되면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나, 빌라도 법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행렬의식을 치른다. 빌라도에게 넘겨져 정식으로 기소된 박석(薄石)이 있는 예수님의 재판 장소에서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부활하신 무덤교회까지 약 1.5Km 이르는 14곳의 장소를 일컫는다.
제1지점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신 빌라도 법정이다.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곳은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에서부터이다.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스데반 성문(사자의 문)을 통해서 성의 안쪽으로 250m 쯤 걸어가면 아랍인의 학교가 있다. 바로 이 학교가 로마 총독 관정(官庭)이 있던 곳이요, 예수님이 재판받은 곳이다.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 19장 16절까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심문)받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눅 23:13-22). 제1지점인 이 학교는 특별한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고 십자가 행렬이 진행되는 금요일 오후(3시)에만 개방하고 있다.
스데반(사자문) 문을 통해 100m 정도 들어가면 왼쪽에 있는 건물로서 로마의 5대 총독 빌라도의 관정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의 수난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해롯 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며 쌓았던 성채로 친구인 로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장군)를 위해 지었기 때문에 안토니아 성채(요새)로 부른다.
빌라도 법정은 현재 아랍인 초등학교인 ‘엘 오마리에’ 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 학교에는 빌라도가 자신의 무죄를 나타내기 위해서 손을 씻었다는 돌 그릇이 있다고 한다. 매주 금요일마다 ‘엘 오마리에’ 학교 앞마당은 ‘작은 형제 수도회’의 프란치스칸(프란시스코 수도회 회원들)의 슬픔의 행렬 예식으로 붐빈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행사가 거행된다. 비아 돌로로사 길은 항상 순례객들로 붐비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 묵상하려면 새벽이나 아침 일찍 나서는 게 좋다.
제2지점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온갖 희롱한 후 십자가를 지게 한 곳이다(마 27:27-31). 오늘날 제2의 장소에는 ‘채찍질 교회’와 ‘선고 교회’’가 있다.
통상 성지에 오는 순례객은 제2지점인 두 교회, 곧 ‘채찍질 교회’와 ‘선고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그 두 교회 중 첫 번째 장소는 입구 오른쪽으로 ‘채찍질 교회’이다. 채찍질 교회는 십자군 시대에 세워졌다. 십자군 시대 채찍질 교회는 웅장하고 멋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멋진 교회가 오스만 터키 시대에 마구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838년 이집트의 ‘아브라함 파샤’가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헌정하여 1839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의 교회는 1927년-1929년에 세워진 것이다.
채찍질 교회(The Chapel of the Flagellation) 내부는 돔(Dom) 형식으로 세 개의 색유리 그림(채색 창)이 있는데 첫 번째는 ‘바라바’가 풀려나서 기뻐하는 장면(마 27:21, 26)이고 두 번째는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마 27:26)이고 세 번째 그림은 빌라도가 자신은 무죄하다고 손을 씻는 모습(마 27:24)이다. 천정에는 모자이크 가시면류관이 묘사되어 있다. 교회의 마당은 안토니아 요새의 한 부분이다.
제2 지점에 있는 또 하나의 교회는 ‘선고 교회’(Church of the Condemnation)이다. 이 교회는 요한복음 19장 13절에 언급된 교회로 ‘박석’은 히브리어로 ‘가빠다’(가바다)이고 헬라어로 ‘리토스트로토스’( )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지만 성난 군중들의 성화에 못 이기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박석(‘리토스트로토스’)이라고 하는 재판석에서 예수님을 넘겨 주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공셍서 재판석에 앉았더라”(요 19:13).
1903년 프란시스코 소속의 ‘웬델린 힌터 코이저’(Wendelin Hinter Keuser)가 십자군 시대의 교회터 위에 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세워질 당시 그 옆에는 1857년에 세워진 ‘에케호모’ 바실리카(교회)가 있었다. 에케호모 바실리카에는 이미 발견된 ‘리토스트로토스’(박석)가 잘 보전되어 있었고 같은 종류의 ‘리토스트로토스’가 이 교회(선고 교회)에서도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발견된 ‘리토스트로토스’를 빌라도 법정이라고 생각해서 교회를 세우고 이름을 ‘선고 교회’라고 지었다. 1923년 이 교회는 비아 돌로로사의 제2 지점으로 정해졌다.
제2지점(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시온 수녀회 에케호모 수녀원’(Notre Dame de Sion - Ecce Homo Convent)이 자리하고 있다. 이 수녀원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urg)지방의 ‘마리아 알폰스 라티스본(Fr. Marie Alphonse Ratisbonne) 신부에 의해 설립된 수도원이다. 그는 1842년 동정녀 마리아의 발현 기적을 체험한 후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였고, 특별히 유대인들의 개종을 목적으로 남녀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55년 예루살렘에 온 라티스본 신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는 ‘에케호모 아치’를 보고 크게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에케호모’ 아치가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끌려 나왔고’(요한 19, 1-5참조), 이때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보이며 “보라 이 사람을”(라틴어로 Ecce Homo!)라고 말하였던 곳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57년 아치와 폐허가 된 북쪽의 땅을 시온 수녀회의 부지로 구입하였고 1868년 수녀원과 성당을 완공하였다. 시온 수도회에서는 1931-33년과 1934-37년 두 차례에 걸쳐 고고학 발굴을 하였는데, ‘아치’(요한 19, 5)와 석판으로 깔린 포장도로인 ‘리토스트로토스’(박석, 요한 19, 13)를 발굴하였고, 이곳이 바로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빌라도 총독의 법정 자리(마 27, 2)라고 확신하였다.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제1차 유대전쟁을 진압한 로마군들은 대성전과 함께 안토니아 요새를 허물었다. 그리고 135년 제2차 유대항쟁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예루살렘은 로마식 성문과 광장, 카르도(대로)와 신전 등이 건설되며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명명되었다. 다마스커스 성문 안쪽에는 로마식 광장을 건설하게 되는데, 안토니아 요새 근처에 있던 작은 저수조인 ‘스트루씨온’(Struthion, 그리스어로 ‘참새’를 뜻하는데 저수조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참새의 저수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함)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구조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이 저수조 위에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지붕을 덮고 석판을 깔았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세 개의 아치형으로 세웠는데, 이 아치 중 가장 큰 것을 ‘에케호모 아치’라고 부른다. 현재의 교회는 1868년에 건축된 것으로 교회 안쪽에 나머지 아치가 남아 있다.
제3지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이곳은 폴란드 교회에서 지은 작은 교회가 그 자리를 기억하게 해준다.
제4지점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이 슬퍼하는 모친 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이 장소에는 아르메니안 사람들이 세운 아담한 교회가 있다.
제5지점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곳이다. 이 지점부터는 올라가는 경사로이다. 이 지점에 까만 대문에 글씨가 쓰여진 카톨릭 프란체스코 소속의 작은 교회가 서 있다. 그 교회의 벽에 손바닥 자국 같은 모양의 흔적이 깊이 패여 있는데 바로 예수께서 지치고 힘드셔서 그 벽에 손을 짚고 잠시 쉬셨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실제로 예수님 당시 ‘비아 돌로로사’ 길은 지금보다 10m 아래에 있다. 세월이 흘러 언덕을 쌓고 쌓아서 높아진 것이다. ‘에케호모’ 교회의 지하에는 로마시대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길 돌바닥이 남아 있다. 바닥에는 로마병정들이 게임을 했던 장기판 같은 것도 있다.
제6지점은 한 여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준 곳이다. 예수님이 얼굴의 땀을 닦고 손수건을 돌려주었을 때 그 손수건에는 예수의 얼굴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의 이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5장 25절-34절에 등장하는 혈루증 여인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가 나음을 입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앓던 혈루증을 예수께서 고쳐주셨던 여인이었으며(막 5:25~34) 예수님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은 수건에는 예수님의 얼굴 형상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1882년에 그리스 정교회가 그 여인의 이름을 딴 성 베로니카(Church of St. Veronica)라는 기념교회를 이 자리에 세웠다. 표지판 아래 돌벽에 새겨진 ‘베로니카’라는 이름이 선명히 보인다.
제7지점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좁아지고 경사는 급해진다. 골고다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이 병사들의 채찍과 발길질에 십자가와 함께 2번째로 넘어지신 장소다. 여기서부터 성 밖으로 나가는 지점이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지어져 골고다의
언덕처럼 보이지 않는다.
제8지점은 울면서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 28)고 말씀하신 곳이다. 이곳에는 희랍정교회에 속하는 수도원이 있다.
제9지점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거의 다 올라가서 세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이곳은 28개의 돌계단 위에 있는 콥틱교회(이집트 기독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10번째 지점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의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지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안에 있다. 열 번째 장소부터 열세 번째 장소까지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위에 도착해서 일어난 일과 관련된 곳이다.
제10지점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 제11지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곳, 제12지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위에서 운명하신 곳. 제13지점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았던 곳. 제14지점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성지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에 큰 기대를 갖는다. 그 현장에서 주님의 고통을 몸소 느끼고 싶은 심정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면 그곳이 아랍지역으로 아랍인들이 순례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좁은 골목시장으로 바뀌어 있어 실망하게 된다. 그 어떤 엄숙함과 경외감은 찾아볼 수 없고 분주하고 혼란스러운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다 문득 '주님의 고난과 아픔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은 죽어서까지 가난한 아랍인을 먹여 살리는구나‘는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 골고다 언덕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그 위에 웅장한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비아 돌로로사의 길. 혼잡하고 성지 같지 않은 분위기라 할지라도 조용히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간다면, 그 고통의 장소에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죽음의 장소에서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