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나 교회
5) 성 안나 교회(Church of the St. Anne)
성 안나 교회(성당)는 올리브 동산쪽으로 나 있는 스데반 문(사자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 탄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업적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데도 주후 170-180년에 쓰여진 위경인 ”야고보 복음서“에 의거하여 마리아의 아버지가 요아킴(Joachim)이고 어머니가 성 안나(Anna)라고 밝히면서 마리아의 부모와 성모 마리아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야고보 복음서를 비롯한 몇몇 외경과 전승을 바탕으로 5세기 말부터 안나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벳자타 연못가를 거룩한 곳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요아킴과 안나의 자녀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전과 가까운 “양의 우물” 인접한 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마리아 탄생교회”(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을 건립하고 교회 건축일인 9월 8일에 성모 탄생 축일을 지내왔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인 A.D. 400년경에 최초로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의 예루살렘 침공 시 파괴되었다. 그 후 모데스투스(Modestus) 수도사에 의해서 복원되었으나 이집트의 파티마조 칼리프(Caliph) 하킴(Hakim Biamr-Allah, 재위 996-1021)에 의해 1010년에 다시 파괴되었다. 그 후 1140년에 십자군 발드윈 1세(Baldwin I)의 황후에 의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다시 세워졌다. 그 뒤로 베네딕트 수녀회에서 관리했으나 1192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살라딘이 이곳을 이슬람 신학교로 개조해 사용했다.
성 안나 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동굴 위에 지어 성모를 낳아 준 안나에게 봉헌한 교회로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이다. 특히 고딕식 둥근 지붕이 아름다우며 음치l(音癡)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릴 정도로 완벽한 내부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기도 하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라틴왕국)이 망한 후 십자군이 지은 대부분의 기념 성전들은 파괴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성 안나 성당만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덕분에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그 대신 당시 무슬림 신학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성 안나 성당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교회 건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교회이기도 하다. 기념성당 출입문 위쪽을 보면 아랍어로 쓰여진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무슬림들이 소유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성당 우측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예배당(경당)이 나오는데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 성인과 성 안나가 살았던 동굴에 지은 기념예배당이다. 그곳이 성모 마리아의 출생장소이다.
6). 베데스다 연못
사자 문 또는 스데반 문으로 불리우는 양 문을 통과하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신 베데스다 연못 터가 나온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아람어 ‘베티스다’라는 말의 음역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오늘날 이 연못은 다섯 개의 행각과 함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옆에는 성 안나 교회가 위치해 있다. 고대 당시에는 이런 치유의 장소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중의 하나인 스데반 문(일명 사자문)에서 성 내부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연못은 예수님 당시에는 성의 북쪽벽 밖 가까운 곳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 문(Sheep Gate, 느 3:1, 요 5:2)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110 m, 너비 62-80 m, 그리고 깊이 7-8 m,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물을 성전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늘 집합되는 장소였고,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로서 성스러운 성지로 지켜져 오는 곳이다(요 5:2-9),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베데스다는 온천과 같은 곳으로서 사람에게 이로운 광물질이 풍부하게 포함된 물이 있었을 것이다. 2세기 순례자들의 사료에 의하면 베데스다의 샘이 움직일 때는 연못이 붉은색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물에 목욕함으로 인해서 일부 환자들의 건강이 호전되었고 소문이 퍼져 많은 병자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어느 특정 장소에 가서 조각상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가 되면서 그 속에 미신적인 요소들도 첨가되기 시작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치유현상을 천사의 활동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긴 가뭄 끝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지하의 수로를 따라 간헐천의 물이 연못으로 유입되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때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한다고 생각하였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고침을 받는다는 미신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8년 동안 병으로 신음하던 한 남자가 그런 미신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걸면서 그 못 가에 누워있었다. 예수님은 병자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그를 치유해주기 원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5-9) 하였다.
8). 성 묘지교회
기독교 유적지의 중심이 되는 성묘지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던 골고다의 언덕과 묻히셨던 무덤 부분을 다 포함해서 그 위에 세워진 웅대한 교회이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자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황후는 성지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가 고생을 무릎 쓰고 성지를 찾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장소인 골고다의 언덕과 예수님 부활의 현장인 무덤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황제의 어머니는 쉽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골고다 언덕에 세운 비너스 신전이 오히려 그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약 200년 전, 주후 135년에 당시의 로마제국의 하드리안누스 황제는 제2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의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었고 동시에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 비너스 신전을 세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헬레나 황후의 명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메카리우스(Mecarius)는 골고다 언덕의 위치를 쉽게 찾아내게 되었고 신전 지하실에서는 예수님께서 못 박혔던 나무 십자가도 발견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으로 비너스 신전은 무너지고 바로 그 자리에 326년에서 336년까지 건축하여 성묘지 교회가 세워졌다.
성묘지 교회가 세워진 지 약 300년 후 이 교회는 첫 번째 수난을 겪는다. 페르샤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교회를 파괴한 것이다(614년). 그 후 이 교회는 재건되었지만, 이번에는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그러다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성지를 탈환한 십자군은 성묘지 교회를 완전히 복구시켰다(1149년). 오늘날 성묘지 교회는 십자군 전쟁 때 재건된 모습 그대로이다. 13세기 말, 아랍의 패권자 살라딘은 십자군과 싸워 그들을 성지에서 몰아냈다. 성지가 다시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1291년). 그러나 살라딘은 성묘지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이 성묘지 교회를 장악하였다는 뜻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돌로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교회의 열린 대문의 열쇠는 이슬람교도 측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약 730년 동안 성묘지 교회는 한 개 문만 사용되었고 그 문의 열쇠는 지금도 이슬람교측이 소유하고 있다. 현재의 교회 내부는 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이집트 콥틱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교회, 이티오피아 교회들이 각각 분할해서 사용하고 있고 최초, 최종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이슬람측이 하고 있다.
9). 통곡의 벽
이곳은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곳으로 옛 성전의 마지막 유물로 귀중히 여기는 곳이다. 주후 66년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항거하는 제1차 유대전쟁을 일으켰다. 로마군대는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시켰고 마지막으로 항거하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 전쟁으로 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굶어 죽고 불에 타죽고, 창칼에 죽고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성벽과 성전은 로마군대가 던진 횃불과 공격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가 주후 70년이었다.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높이 1.2m, 길이 1,5m- 2m)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헤롯 왕이 주전 20년에 개축한 제2 성전의 서쪽 부분이다. 성전산 서쪽 벽의 총 길이는 약 485m 이였는데 지금은 약 60m 정도가 남아 있다. 그 높이는 약 18m가 된다. 그 벽은 커다란 바위들로(바위 하나가 높이 1,2m, 넓이 1,5m-2m에 이른다) 쌓아 올려진 것으로서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Titus) 장군이 제2 성전의 다른 부분은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을 남겨둔 이유는 후세의 사람에게 성전을 파괴시킬 수 있었던 로마군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2차 반란은 주후 132년-135년에 일어났다. 그 두 번의 반란으로 유대는 로마로부터 큰 보복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하드리안누스(Hadrianus) 황제는 로마제국의 지도에서 유대라는 이름을 지워버리고 유대인들의 숙적(宿敵)인 블레셋 사람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틴’(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의미) 땅으로 불렀다. 이것은 이 땅이 유대인의 땅이 아니라 유대인의 적인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의미를 부각시켜 유대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이름도 로마식 이름인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모두 추방해 버렸다. 그 후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로마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비쟌틴(기독교 공인) 시대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성전이 파괴되어 무너진 날, 곧 아빕월 9일(양력으로 7, 8월)에만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날 이곳에 와서 그들 민족이 분산됨을 슬퍼하고 그들의 성전이 폐허됨을 통곡하였기 때문에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수 세기에 걸쳐서 계속되었는데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이 지역이 요르단령에 속하게 됨으로서 유대인들은 다시 방문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1967년 6월 5일에서 10일까지의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 지역을 탈환함으로써 이곳은 범국가적 즐거움과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앞의 넓은 공터를 수천 명이 기도할 수 있도록 다듬어 놓았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성전산 서쪽 벽에 모여 슬피 우는 것은 이 성전산 서쪽 벽이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직접 성전산에 올라가지 않고 이곳에 모여 울었을까? 그것은 파괴된 지성소를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서 성전산에 들어가다 보면 자칫 잘못하여 지성소를 침범하게 되지 않을까 삼갔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날도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성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경내에 들어갈 때는 유대인이든, 관광객이든 꼭 “키파”(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정수리를 보이지 않게 머리에 쓰는 작은 모자)를 써야 한다. 성벽의 틈새에는 종이쪽지들이 빽빽하게 끼워져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순례객들이 간절한 소망을 종이에 써서 기도드릴 때에 그 통곡의 벽 틈에 끼워 놓은 것들이다.
길이 60m, 높이 18m인 통곡의 벽을 찾는 기독교 신자들은 흥분의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역사적으로 증언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벽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고함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뒷모습도 바라보았을 것이다.
통곡의 벽 왼쪽 벽을 따라 아치형 동굴로 들어가면 토라와 서적을 모아놓은 작은 서가(書架)가 있고 약 12세 정도 된 어린이들이 토라를 읽고 배우는 교육장이 있다. 이곳은 유대교 정통주의자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토라 교육을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일반 사람들은 들어가기 어렵다). 이곳 통곡의 벽에서 까만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이마에 작은 성냥갑 같은 것을 붙이고 팔뚝에는 작은 가죽 띠를 두르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신 6:4-9). 철저하게 율법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기 위함이다(신 6:8). 또 유대교 정통주의자들이 사는 집 대문에는 우측에 율법을 기록한 말씀인 ‘메주자’를 넣어 보관하고 있다(신 6: 8-9).
지금은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막기 위해 장갑차로 무장해 지키고 있다.